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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아침에 부쳐

옥상별빛 2017. 6. 25. 03:22

 

조선의 힘이 약하여 외세 침탈이 심해지는 가운데 35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 영국 · 중국의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카이로 회담은 1943년 11월에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특히 일본에 대한 공동 대응이 결정되었고, 식민지에 대한 포기를 결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한 논의를 처음 국제적으로 합의한 회담입니다.

 

1945년 12월에는 모스크바삼상회의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는데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미 ·소 양국 대표자들이 모여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과정으로서 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를 두기로 합의하게 됩니다.

 

19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비회담을 열었고,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2항과 3항의 조항에 따라 제1차 회의를 열었습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7월 신탁통치 반대투쟁 단체를 둘러싼 논란과 미국측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결국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은 북한을 앞세워 적화통일을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6년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습니다.

 

반면에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습니다.

 

당시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하였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야욕에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1947년에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군사분계선을 두고 남북이 서로 대치하는 것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의 남하를 막고 한국을 오랫동안 지배권 아래에 둘 수 있는 대안이었습니다.

 

이 무렵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습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습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폭풍" 이라는 작전명 하에 북한은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국군이 용감히 맞서 싸웠지만 3개월만에 낙동강 방어선만 남기고 적의 수중에 들어가 거의 잡아먹힐뻔 했습니다.

 

다행히 미국의 맥아더 장군을 선두로 핫 인천상륙작전 개시로 북한군의 허리를 졸라 북으로 진격하여 통일을 눈 앞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1.4 후퇴를 단행하고 1951년 3월 15일 서울 재수복 후, 전쟁은 소강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7월 27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은 휴전으로 70여 년 동안 살아왔고 앞으로도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해결 방안이 안 보입니다.

 

 

독일은 자력으로 이미 1991년에 통일을 이루었고 베트남은 내전으로 공산화 통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구상에 분단된 채 남은 것은 유일하게 한반도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핵개발과 위협으로 한반도는 물론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고 우리는 국론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각종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낸 저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에 관해서는 그 어떤 사람도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저하거나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은 파로 불쌍한 북한주민들 때문입니다.

 

북한 공산당이야 주민을 괴롭히며 배불리 잘 먹으니까 이대로 분단된 채 나가는 것이 저자들이 원하는 희망 사항이곘지요?

 

우리도 우리끼리만 잘 살면 되겠지만 이대로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는 것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잘 산다고 큰소리를 쳐 본들 김정은은 몸매가 예쁜 아가씨를과 고급 와인 몇 잔 즐기다가 "야, 미사실 몇 방 쏴 버려" 라고 조정하는 순간 우리의 생명과 재산은 풍지박산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돈이 많다고 가진 것이 많다고 우쭐대지만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한 자기 것이 아닙니다.

 

국론 분열은 결국 파멸을 좌초합니다.

힘이 없으면 평화가 없습니다.

 

이제 곧 있을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사드 배치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시위가 어제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서울광장에서 미국 대사관 근처까지 행진한 뒤 인간 띠 잇기를 끝으로 집회를 마무리했다지만 이또한 국론분열의 한 사례입니다.

 

이왕 배치하려는 사드 계획은 밀고 나가고 우리 자체 기술로 고성능 무기를 개발하여 북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합니다.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평화른 외쳐본들 다 소용없습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목숨 걸고 지켜온 이 땅을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6.25를 생각하면서 정신 바짝 차리고 나라사랑 정신으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국가를 전복하려는 불순세력을 몰아내고 자유와 평화와 박애 정신을 담보로 하는 통일이 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고 다짐하는 아침이었으면 합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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