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는 조선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의 큰아들 덕종(의경세자)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로 한확의 딸이다.인수대비 한씨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韓確, 1403~1456)의 6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청주 한씨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인수대비의 집안은 그녀의 고모 2명이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었던 것이다. 부친인 한확은 순창군수 한영정의 아들로 그의 누이는 명나라 공녀로 갔다가 명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여비(麗妃)이다. 말하자면 인수대비 한씨의 큰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것이다.
이리하여 인수대비의 부친 한확은 젊은 시절 누이의 후광을 업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명 황실과 인척이 된 한확은 명나라와 조선의 민감한 사안을 도맡아 담당하는 비중있는 인물로 성장하였고, 실제로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명 황제가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벼슬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특히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했을 때에는 조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고명(誥命- 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오기도 했다.
조선 정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한확의 위치로 볼 때,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437년(세종 19)에 둘째 딸이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桂陽君)과 혼인하였고, 1455년(단종 3)에는 여섯째 딸(인수대비)이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桃源君, 성종의 부친으로 덕종으로 추존됨)과 혼인하였다. 야망이 컸던 수양대군은 훗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명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확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으로만 봐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양대군은 한확의 힘과 위상을 잘 이용했다. 한확은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과 왕위찬탈이 성공하자 그를 비롯한 청주 한씨들이 대거 공신에 책봉되었다. 도원군 또한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한씨도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수빈 한씨가 된 그녀가 왕비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부친의 사망에 이어 불운은 계속되었다. 수빈 한씨는 결혼 직후 맏아들 월산대군과 명숙공주를 낳았고, 이어서 1457년(세조 3)에 둘째 아들이자 훗날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을 출산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남편인 의경세자가 갑작스런 질병으로 사망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행이 찾아왔다. 이때 의경세자의 나이 20세였고, 한씨는 21세에 불과하였다. 두 날개였던 부친과 남편이 1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비가 될 꿈을 접어야 했다.
불과 2년 3개월 밖에 안된 세자빈 생활이었다. 남편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 부친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최소한 세자 자리는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에게 주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8살에 불과한 시동생 황(晄,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위기 뒤에는 기회가 온다더니 세자 시절 건강했던 예종은 부친인 세조의 병간호와 즉위 후 정무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 예종이라는 시호를 받고 싶다는 말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정희왕후는 후계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독촉 속에 한씨의 첫째 아들은 병치레가 잦아 제외되고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1469년 11월 28일 자을산군인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 머물던 한씨도 12년만에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청상과부가 되어 궁궐을 떠난 지 12년만이었다.
성종은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희왕후는 학식이 깊은 한씨에게 수렴청정을 수차례 양보하였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성종의 치세 기간에 인수대비 한씨의 정치적 영향은 대단히 컸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의경세자의 위호(位號)와 어머니의 위상 문제가 대두되어 성종 1년에 의경세자의 시호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를 인수왕비(仁粹王妃)로 정해지고 2년 뒤 인수대비는 남편이 덕종(德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덕종비(德宗妃)가 되었다.
인수대비란 윤씨의 생전의 존칭이었고,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는 죽은 후에 내려진 것이다.
정리하면 지금까지 인수대비는 소혜왕후라는 시호 외에도 인수왕비, 인수왕대비, 덕종비, 회간왕비(懷簡王妃)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라는 시호보다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유명한 한씨는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여성 지식인이다.
인수대비는 아들인 성종의 후궁인 폐비 윤씨를 잘못 간택한 탓으로 훗날 손자인 연산군의 폭정에 충격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인수대비는 [내훈(內訓)]이라는 여성 교육서를 만든 대단한 지식인이었다.
어려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탓에 인수대비는 불교에 심취하였고, 성종이 도첩제를 폐지하고 불교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나타낼 정도였다.
당시 조선시대 성리학의 이념에서 여성에게 요구된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었다. 이에 여성에게 유교적인 덕목을 가르칠 필요성을 느낀 인수대비는 1475년(성종 6) 점점 늘어나는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39살에 편찬하였다. 인수대비는[내훈] 에서 부인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도를 높이고 부부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유교 덕목을 실어 여성도 유교적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잘 나가던 인수대비도 며느리를 잘못 들이는 바람에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비(尹妃)와의 관계는 나쁜 악연이었다.
수준 있고 교양 있는 높은 여성상을 목표로 한 인수대비에게 윤비는 아주 모자란 며느리였던 것이다.
본디 성종의 첫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그녀가 1474년 후사 없이 사망하자 연산군을 잉태한 후궁 윤씨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인수대비에게 막강한 친정 세력이 있었다면, 윤비는 가난한 대간(臺諫) 집안 출신의 딸로서 보잘 것 없었다.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강조하는 [내훈]의 내용에 저촉되는 것을 인수대비는 결코 용납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성종이 규방 출입이 잦다는 것에 질투하여 성종의 얼쿨에 손톱 자국을 내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인수대비는 윤비의 폐출과 사사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것이 불행한 노후를 자초하고 만 것이었다.
성종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윤비는 이를 참지 못했다. 성종이 엄귀인과 정귀인을 총애하자 윤비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윤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이를 바른 곶감을 두었다. 인수대비와 성종은 분명히 이 곶감이 왕과 후궁을 죽이려는 윤씨의 의도라 생각하고 폐비시켰다.
결국 윤비는 왕비가 된지 8개월 만에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났지만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윤비의 폐비와 사사 문제를 원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렇게 순했던 성종도 마누라를 죽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악의 불씨를 끄면 그만이었던가!
며느리를 죽이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이나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공론화 하지 못하도록 한 성종의 유언이 오래가지 못하였다.
조선 최고의 폭군인 연산군은 바로 폐비 윤씨의 아들로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탓인지 점점 괴퍅한 성격으로 번해갔다.
척신 중에 임사홍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갔다.
8살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고 19살의 나이에 오를 때까지 학문에 뜻이 없어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을 귀찮아 했다.
연산군은 부친의 후궁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궁 안뜰에 결박하고서는 아들인 안양군 항(㤚)과 봉안군 봉(㦀)을 불러 모친들을 때리게 만드는 패륜을 범하는가 하면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는가 하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하며 분노했다. 연산군은 엄숙의·정숙의를 죽인 뒤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을 담그고 산과 들에 흩어 버렸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지켜 본 인수대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을 적에 어느날 연산군이 불쑥 찾아와 자신의 머리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몸을 거칠게 밀치고 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자리에 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약한 인수대비는 연산군과의 갈등과 마찰 속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할머니의 죽음에 이르러서도 슬퍼하기는커녕 3년 상까지 폐지할 정도로 많은 원한을 품었다.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이후로 자식 교육과 아랫사람을 경계함에 추호의 빈틈도 없어 ‘폭빈(暴嬪)’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고 그러한 강한 집념은 자을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리는 동력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폐비 윤씨를 부덕한 여성으로 몰아 사사에 이르게 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의 폭정을 잉태하게 하였고 피비린내나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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