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8일 1년에 한 번 있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폐막한 그날, 리커창 중국 총리는 연례 총리 기자회견에서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중국의 빈곤 문제에 대한 기자 질문에 대답하는 중에 「지금의 중국에서는, 6억명이 월수입 1000위안 전후」라고 발언한 것입니다.
당시 총리의 기자회견은 CCTV에서도 생중계됐기 때문에 리씨가 담담하게 밝힌 이 숫자는 곧바로 전국에 보도돼 언론과 국민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올해 3월 국가통계국이 공표한 2019년 국민 1인당 GDP는 7만 892위안(1만392달러)로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한편, 14억 국민 중 6억 명이 "월수입 1000위안(=연봉 1만 2000위안)"이라면 앞서 기술한 "1인당 GDP"와의 낙차는 너무나 큽니다.
참고로 1000위안 이면 한화로 36만원 정도인데 사실 대도시를 제외한 곳에서는 월수입이 낮은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전체 인구의 40% 이상인 6억 국민이 아직도 빈곤에 허덕이고 있음을 이씨가 보여준 숫자에 의해 많은 국민이 알게 됐습니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걸맞지 않게 빈부의 차가 엄청안 나라가 바로 중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중국 경제의 실태를 폭로한 리의 월수입 1000위안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은실상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도전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시진핑 주석은 2015년경부터 「2020년에 탈빈곤, 샤오캉 사회의 전면적 실현」을 스스로의 정권의 간판 정책으로서 내걸어 왔습니다.
그후의 5년간, 시진핑은 계속 전국의 당간부에 대해서 「탈빈곤·전면 샤오캉」실현의 대구령을 계속 걸어 왔습니다.
지방 간부들은 최고지도자의 생각을 헤아려 '탈빈곤의 성과'를 잇달아 만들어 내어 시징핑의 눈도장을 찍으려 했습니다.
금년 들어 성·자치구의 상당수는 「우리 지방은 빈곤 인구의 전원이 탈빈곤 직전」이라고 선언하기 시작했는데 인구 8000만 명의 장쑤성에 이르러서는 올 1월 7일 아직 빈곤하지 않은 사람은 불과 17명이라고까지 선언했습니다.
각 지방에서 잇단"빈곤 탈출 보고"에 근거한 시 정부는 2020년 연말에 "14억 국민 모두가 빈곤 탈출하는 전면 소강 사회가 실현된 "과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그것을 시진핑의 위대한 업적으로 삼을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총리인 리커창의 입에서 나온 하나의 숫자로 인해 그의 위업 달성은 상당히 위태로워졌습니다.
어떠한 기준으로 「14억명이 탈빈곤」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시진핑 정권은 다양한 숫자의 조작을 「궁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6억 국민 월수입 1000위안인 상황에서 그가 줄거리대로 올 연말 14억 전원탈빈곤을 선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억지로 선언해도 아무도 믿지 않고 그저 우스갯소리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요컨대 중국 유사 이래의 위업을 달성한 위인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시진핑의 계획은 리커창의 말 한마디에 거의 완전히 박살났고 중국의 꿈이 아닌 시진핑의 꿈 중 하나가 이로써 깨진 것입니다.
리커창 총리의 폭탄 선언은 시진핑에 대해 벌인 기습작전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이커창의 발언이 시진핑을 비판한 것도 아니고 시진핑 이름조차 대지 않은 채 시진핑에게 안면펀치 타격을 입혔다는 점입니다.
리커창 총리야말로 국가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국민과 국제사회에 심어준 반면, 시진핑은 오히려 나라 실정을 무시하고 허풍을 떠는 정치인으로 국민의 눈에 비쳐졌기에 시진핑에게는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느덧 7월이 되자 시진핑의 반격이 예상치도 못한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7월 21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베이징에서 국내 경영자들을 초청해 기업인 좌담회를 갖고 중국의 경제 문제를 토의했습니다.
좌담회에는 시 외에 왕양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 왕위닝 정치국 상무위원, 한정 부총리가 참석했습니다.
공산당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멤버 7명 가운데 시을 포함해 4명이나 참석했으니 그야말로 이례적인 고위급 회의였는데 놀랍게도 리커창은 불참했습니다..
리커창이 불참한 원인은 외유나 지방시찰을 위해 베이징을 비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같은 달 7월 21일, 그는 베이징에서 다른 외교 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인민일보의 보도로 판명되었습니다.
물론, 시진핑 주최의 중요 좌담회이기 때문에, 이커창이 스스로 참가를 거부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거절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진핑 자신이 리커창을 부르지 않은 게 불참 이유로 보여지는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사건입니다.
직무담당이 경제운영과 전혀 상관없는 왕웨이닝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회의에 불려갔는데 리커창을 부르지 않은 것은 불리지 않은 것은 너무 노골적인 왕따였기 때문입니다.
시진핑을 통한 이커창 제거는 당연히 앞서 언급한 리의 기습작전에 대한 반격 또는 보복일 것입니다.
시진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경제정책을 무너뜨린다면 이커창을 경제운영의 중추에서 몰아내겠다는 의미의 행동으로 그이후도 가급적 이커창을 경제정책 의사결정에서 배제한다는 게 시진핑의 기본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8월 24일 시진핑이 9명의 전문가들을 불러서 좌담회를 열고 제14차 5개년 계획을 논의했을 때에도 왕예녕·한정이 참석했지만, 리커창은 역시 '결석'했습니다.
이쯤 되면 치열해지는 시진핑과 리커창의 정치투쟁은 노골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8월 초 연례 베이다이허 회의가 끝난 직후에 리커창은 또다시 뜻밖에 시진핑에 대한 과감한 기습작전을 펼쳤습니다.
올 7월 중순부터 창장 강 유역에 폭우로 인한 홍수가 발생해 후베이 안후이 장시 성에서는 큰 피해가 나자 반격할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후진타오 시대까지의 중국 공산당 정권 전통에서는 대수해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국가주석 혹은 총리 등 중앙지도자는 반드시 재해 현장을 시찰하고 진두지휘를 했습니다.
하지만 시진핑 정부 들어 어찌된 영문인지 이 전통이 완전히 무너지고, 재해가 있어도 그의 지도자들은 좀처럼 현장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시진핑이 겨우 안휘성의 수해 지역에 들어간 것은 8월 18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중국에서는 중경직할시에서 엄청난 수해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싼샤댐의 주로 방류가 원인이지만 8월 18일부터 며칠간 대도시 충칭은 물류가 멈출 정도의 수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수해가 끝난 뒤의 안휘성을 시찰한 시진핑과 달리 리커창은 8월 20일 수해가 한창인 충칭으로 날아가 전격 시찰했습니다.
시찰에 나서 그는 수해현장을 직접 누볐고 다음 날인 21일 이커창이 1위인 국무원 관할 중국 정부 공식 사이트에 충칭의 수해 현장 현장에서 그가 장화를 신고 흙탕물을 헤치며 걷는 사진 여러 점이 올라왔습니다.
장화로 흙탕물을 걷는 리커창의 사진은 보도되자마자 인터넷에 급속도로 확산돼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중국 인민은 적절한 지도자의 모습을 오랜만에 본 것과 동시에 며칠 전 보았던 다른 시진핑의 사진을 떠올렸습니다.
수해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깨끗한 가죽신을 신고 유유히 관광 유람을 하는 시진핑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었던 사진 두 장 말입니다.
두 사람의 사진을 뇌리에 나란히 재현했을 때 많은 국민 가운데 얼빠지고 무책임한 지도자 시진핑과 위험을 무릅쓰고 흙탕물을 헤치며 걷는 믿음직한 지도자 리커창의 이미지에 중국인들은 많은 생각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두 지도자의 행보가 어쨌든 이커창 총리는 중경직할 재해 한복판을 둘러보고 일부러 흙탕물을 헤집고 다닌 그의 노림수가 시진핑의 얼굴에 한주먹 멋지게 날린 셈입니다.
시진핑의 관광유산 시찰 이틀 뒤 리커창이 수해 피해지인 충칭으로 날아가 시찰한 것은 오히려 주도면밀한 계산에 이은 정치행보로 본 시진핑은 언론사에 압력을 행사했는지 모르지만 8월20일부터 23일 밤까지 신화통신 인민일보 CCTV 등 3대 중앙매체는 리커창의 중경 시찰을 완전히 묵살하고 일절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 2인자인 수상의 지방시찰을, 당중앙 거물의 행보를 완전 묵살하는 것은 실로 이례중의 이례적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선전기구를 쥔 시진핑 측이 그의 중경 시찰 소식을 국민에게 알릴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리커창의 지방 순찰을 완전히 묵살하는 시진핑 측의 행태는 너무 거칠고 서투른 것이었습니다.
공산당 당내에서도 민간에서도 큰 비판이 일 수 있는 가운데 23일 밤이 돼서야 CCTV와 신화통신이 며칠 전 구문을 보도했고 그리고 다음날인 24일 인민일보에서도 그의 중경 시찰 소식은 한 단면을 장식했습니다.
결국 당내와 민간의 이커창 총리 지지 동정 소리에 밀려 시진핑 측의 리커창 감추기는 완전히 실패했고, 리커창의 기습작전은 다시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이상은 올 5월 이후 리커창 중국 총리가 시진핑 국가주석을 상대로 많이 판 싸움의 자초지종인데, 이 배경에는 당연히 시진핑과 리커창의 오랜 불화와 라이벌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2007년 당 대회에서 후진타오 전 주석의 후계자를 결정할 때 후는 자신이 이끄는 공청단파의 희망이자 자식 키우기 리커창을 자신의 후계자로 밀고 싶었습니다.
이에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던 장쩌민 일파는 그 대항마로 시진핑을 내세웠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장쩌민파의 승리로 이어지면서 시진핑은 차기 최고지도자 자리를 약속받았고, 2012년 당 대회에서는 성공적으로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돼 이듬해 국가주석이 됐습니다.
반면 리커창은 최고지도자가 될 기회를 박탈당해 시진핑 하의 총리 직에 만족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갈등이 있고 라이벌 의식이 강하며 신뢰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정권이 들어선 뒤 시진핑은 독재적 성향을 강화하고 외교 경제운영 등의 결정권을 총리 리커창에게서 통째로 빼앗아 정권 내에서 이른바 리커창 봉살을 추진했습니다.
반면 리커창은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인 지난 8년 내내 은인자중하면서 본의 아닌 입장에서 총리직을 담담하게 수행해 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올해 무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자 시진핑이 선두 지휘를 하지 않고 리커창 총리에게 맡겨졌습니다.
리커창은 무한을 페쇄하며 위기대응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무한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확대가 걷히려는 시점에야 시진핑은 역병 대책은 줄곧 내 직접 지휘 하에 있었다고 선언해 리커창의 공을 가로챘습니다.
이처럼 시진핑과 이커창의 밀고 밀리는 유치한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묵묵히 기회만 노리는 리커창과 시진핑의 힘겨루기는 두 당사자만 알뿐 중국인들은 모릅니다.
그도 그럴것이 언론과 SNS를 통제하는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중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고 누가 알고 있다고 해도 함부로 입밖으로 꺼낼 수도 없습니다.
미국처럼 노골적으로 정적을 비방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중국 사회주의 체제 하의 힘겨루기 싸움은 상상 이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최후 승자는 과연 누가 될까요?
* 사진 출처: 네이버
* 이 기사는 일본 야후에 실린 내용을 편집하였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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