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대정읍 올레길 10코스를 걷다보면 송악산 북쪽으로 낮은 오름이 보입니다.
이 오름을 섣알오름이라고 부르는데 6.25때 역사적 비극이 있었던 곳입니다.
제주 4.3이 진정 국면을 맞이할 무렵 이승만 정권은 요주위 인물을 예비검속으로 구치소에 가두었다가 6.25가 일어나자 이들을 새벽에 섣알오름에 끌고와서 총살하고 시신을 유기한 비극의 현장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당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 구금했는데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도 820명의 주민을 검속했습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한림·한경·대정·안덕 등지에서도 374명이 검속됐는데, 이들 중 149명을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하였다가 1950년 8월 20일 새벽 4~5시경 섣알오름에서 집단학살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같은날 새벽 2시경 한림지서에 검속되었던 63명도 계엄당국에 의해 집단총살 당하여 이곳에서의 희생자는 212명에 이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끝나나자 19560년 5월에 유족들이 132구의 시신을 수습하였으나 DNA 검사를 요청할 상황이 아니어서 머리, 몸, 팔다리를 대충 짜 맞추어 사계리 공동묘지 옆에 안장하고 '백조일손지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자기 부모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며 사는 유족들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6.25만 아니었어도 살아났을 예비검속자들은 정부의 매뉴얼도 없이 즉결 처분이라는 명령 아래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발포를 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어느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을텐데 죽기 전에 양심 선언이라도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화재를 바꾸어 우리 땅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대비하여 을지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정부 각 기관은 전시 단계별로 행동지침인 매뉴얼을 만들고 매년 수정 보완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가령 전쟁이 발발하면 경찰은 상황실을 꾸리고 유치장 피의자들은 후방 경찰서로 보냅니다.
이때 각 지방에 있는 구치소는 수많은 죄인을 다 수용할 수 없기때문에 가벼운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은 일시 석방합니다.
법무부는 상황에 따라 일시 석방, 전시 가석방, 후방 이감 등의 방법으로 나눴는데 일시 석방은 미결수 등 형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매뉴얼대로라면 6.25때 예비검속으로 갖힌 사람들도 다 풀려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과 강도 등 중범죄자들은 옮겨지는데 그렇다고 즉결 처형은 없습니다.
재소자를 병력으로 활용하는 방안은 이들이 믿음이 안 가기 때문에 재소자들에게 총기를 지급했다가 민간인을 해치는 등의 우려가 있어 아예 검토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그저 행복할 따름입니다.
*사진 촬영지 : 서귀포시 대정읍 섣알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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