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는 즐거움/오늘의 세계

초상화가 사라진 날

옥상별빛 2025. 12. 28. 06:45

류현유

 

그가 태어난 곳은 평양이었다.
류현우의 어린 시절은 북한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안정된 세계였다. 아버지는 김일성 주석을 호위하는 사령부에서 40년 넘게 근무한 고위 간부였고, 어머니는 국가계획위원회 소속이었다. 하루 쌀 1킬로그램, 한 달에 돼지고기 5킬로그램이 배급되던 집. 체제의 심장부에 가까운 가정에서 그는 자랐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평양외국어학원에 진학했다. 소수만 허락되는 엘리트의 길이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체제를 대표해 바깥세상으로 나갈 자격을 의미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외교관의 꿈을 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모든 것이 무너졌다.
‘고난의 행군’. 국가는 배급을 멈췄고, 사람들은 굶기 시작했다. 대학을 막 졸업한 그는 자강도 강계로 보내졌다. 영하 40도의 겨울, 쌀은커녕 풀뿌리조차 없던 땅. 아이들과 아기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그 자신도 맹장이 파열돼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 시절,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쌀을 훔쳤다.
암시장에 팔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삶은 절박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고, 결국 외교관이 되었다.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관. 2017년, 그는 임시대리대사에 올랐다. 체제의 대표로 외국에 서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늘 ‘장인’이라는 그림자가 있었다.

 

장인 전일춘.
노동당 39호실의 전 책임자. 김씨 일가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이른바 ‘금고지기’. 김정일과 중·고교 동창이었던 그는 누구보다 권력의 심부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충성의 대가는 냉혹했다. 은퇴와 동시에 집과 가구, 자동차를 모두 반납하고 남은 것은 감자 몇 킬로뿐이었다. 권력의 비밀을 아는 자에게 허락된 노후는 없었다.

 

류현우는 장인을 통해 젊은 김정은을 만났다.
2009년, 병문안을 온 그는 공손하고 예의 바른 청년처럼 보였다. 팔을 붙잡고 “앉아 계시라”고 말하던 모습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후계자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류현우의 마음에는 불안이 싹텄다. 공적 없는 20대 지도자. 그리고 그 불안은 2013년, 장성택 숙청으로 현실이 되었다.

 

총살. 연좌. 수용소.
사법 절차 없는 처형은 일상이었고, 독재자의 말 한마디면 존엄은 사라졌다. 그날 이후 그는 이 체제가 언제든 자신을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정적인 순간은 2017년에 찾아왔다.
대사관 이전 작업 중, 김정일의 초상화가 사라진 것이다. 등록대장에도 없는 초상화. 동료는 말했다. “문제 되지 않는다. 입만 다물면 된다.” 그는 믿었다. 그러나 먼저 귀국한 동료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겼다.

 

북한에서 김씨 일가의 초상화를 잃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밤마다 고민했다.
귀국하면 체포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있었다. 죄 없는 아이가 정치범의 자식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견딜 수 없었다. 그때 그는 결심했다. 떠나야 한다고.

 

2019년 9월, 그는 가족과 함께 한국 대사관으로 뛰어들었다.
탈북은 성공했지만, 남은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는 프리랜서로 살아가며 불안정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잘한 선택이었다.”

 

2021년, 북한 국영방송 화면 속에서 장인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알았다. 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는 순간, 자신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말한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기록이라고.
체제의 내부를 알고도 침묵했던 한 인간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한 선택이라고.

초상화가 사라진 날,
그의 조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출처: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