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는 즐거움/이러면 안 되지요

애국가를 바꾸자는 논란에 부쳐

옥상별빛 2021. 1. 3. 06:29

새해 첫날부터 전직 대통령 사면 문제에 운을 띄우는가 했더니 광복회장은 신년사에서 표절과 친일·친나치 행위로 얼룩진 애국가 작곡가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이루어내겠다고 밝혔습니다.

 

김 회장은 애국가 제정은 지난 75년간 우리사회의 갈등과 분열은 친일 미청산에 기인한다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김 회장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 때도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안익태씨는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보통학교와 숭실학교를 다니다가 1921년에 일본에 건너가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 특기생으로 입학해 중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26년에 도쿄고등음악학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한 뒤 1930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서는 신시내티 음악원,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를 배웠고 1932년에는 신시내티 대학의 학생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수석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35년 11월 필라델피아의 커어티스음악학원에서 작곡을 공부할 무렵 안익태는 40여 개 나라의 국가를 수집하고 세계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자료로 삼고 1936년 베를린에서 작곡했다고 알려졌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할 무렵 자리에서 애국가를 발전시켜 만든 곡인 한국환상곡이 처음 공연되었습니다.

 

안익태는 1930년대 후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보조 지휘자로서 활동하면서 그의 지원을 받아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일본 정부를 위해 작곡해 준 <일본 축전 음악>과 관련이 있어서 친일 행적과 결부된 탓에 논란이 뜨겁습니다.

 

안인태는 1944년 12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환상곡의 자필 악보를 완성했고, 1946년에 스페인 여성인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고 이후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스위스 맥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객원 지휘자로 출연하면서 스페인으로 귀화했습니다.

1955년 3월에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국환상곡의 한국 초연을 지휘한 적이 있습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마지막으로 건강 악화로 투병하다가 1965년 9월 16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2000년대 와서 애국가의 저작권료가 스페인에 거주하는 후손들에게 지급돼왔단 사실과 친일에 표절까지 거론당하면서 애국가를 새로 바꾸자는 이야기는 또다시 떠올랐으나 2005년 안익태 후손들이 애국가의 저작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넘어왔습니다.

이에 KBS교향악단이 녹음본에 대한 음원 저작권 등록을 해 버리자 2018년 12월 정부는 애국가의 새 음원을 만들어 상업적으로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광복회장이 자꾸 애국가 문제를 거론하는데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의 행적에 대한 연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설사 친일 행적이 드러난다 해도 이제 와서 애국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일재 잔재를 다 없애는 것이 친일천산이라면 제주도내 진지동굴, 격납고 고사포 진지도 다 부수워야 합니다.

 

하지만역사의 아픈 상처를 부순다고 해서 과거의 뼈아픈 상처까지 지워지지 않습니다.

 

헛돈을 들이며 부수는 것보다는 보존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오히려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한편 우리말이 있음에도 버젓이 쓰는 일본말이나 찾아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지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애국가를 바꾸는 것은 정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 사진 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