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자도
○ 설촌 유래
추자면이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기 662년 신라의 문무왕 때와 백제시대에 탐라가 예속되어 조공이 있었던 점을 미뤄 제주에서 육지를 왕래하던 선박들이 해상의 중간지점인 추자도를 후풍지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조선조 성종 때에 편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제주목〉편에 추자도 부분이 나오는 데 거기에 추자는 제주목의 북쪽 바다에 있는 주위가 30리이며 수참(水站)의 옛터가 있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이 섬에는 그 시대 이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같은 기록에는 고려 원종(元宗)11년 삼별초(三別抄)가 진도를 거쳐 탐라로 돌아온 후 고려장수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炘都)가 이들을 치러 올 때(1273년) 추자도에 후풍하면서 어망제작법 등을 가르쳐 준 공을 생각하여 이 섬의 이름을 후풍도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고려말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므로 추자도를 지키기 어려워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과 집단 이주 정책을 쓴 적이 있었고, 1350년(고려 충정왕 2) 제주의 외도동 지경으로 집단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조 인조 때 사람 김상헌(1570~1652)이 어사의 명을 띠고 주로 제주지방을 순행하면서 쓴 기행문인 『남사록』에는 김상헌이 제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며 바람을 만나 추자도의 당포(堂浦) (대서리포구)에서 3일 간이나 후풍했던 기록 및 추자도 지명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고 있다. 이 『남사록』에는 김상헌이 추자도에서 후풍하는 동안 ‘선상에서 유숙함’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1601년에는 거주민이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후 1724년에는 안조환이 추자에 유배된 것으로 보아, 1700년대 전후에 다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 대서리
대서리는 상추자도 서북쪽 해안에 있는 어촌 마을이다. 현재 추자초등학교, 면사무소, 우체국, 수협 등이 입지하여 추자면의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이며 가장 큰 마을이다. 상추자도에는 대서리와 영흥리 두 마을이 있는데 서쪽 끝 추자항에서 바라보면 같은 마을처럼 보일 정도로 가까이 인접해 있다. 앞바다에는 염섬, 수령섬, 악생이, 이섬, 추포도, 흑검도, 횡간도 등 많은 섬들이 보인다.
대서리의 마을 형성과 관련해서 남아 있는 문헌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다만, 1998년 북제주군과 제주대학교 박물관팀에서 대서리 후포(後浦) 쪽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유적을 발견하여 재조사 중인데, 이 사실이 확인된다면 대서리의 마을 형성 시기는 청동기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을 형성과 관련하여 마을 주민들 사이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고려 최영장군이 제주도로 목호(牧胡)를 치러 갈 때 여기서 후풍하며 섬 사람들에게 그물 깁는 법, 고기 잡는 법 등을 가르쳐 줬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사실은 「제주행병도평의사사신(濟州行兵都評議使司申)」 『이문(吏文)』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최영 장군이 1374년(공민왕 23) 묵호를 정벌하기 위해 8월 12일에 진도를 출발하여 24일에 바람을 피하고자 추자도로 들어가 있다가 28일에 제주로 출발하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갈 때 9월 23일에 제주를 떠나 추자도에 24일부터 10월 18일까지 머물렀다고 하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실제로 최영이 꽤 긴 시간 동안 추자도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최영이 대서리 주민들에게 실제로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줬는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 이렇듯 14세기에는 대서리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1989년에대서리에서 고려시대 이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장경호와 청자대접, 청자접시가 발굴되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대서리는 약 300여 년 전 밀양 박씨(密陽 朴氏)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제주 고씨(濟州 高氏), 전주 이씨(全州 李氏), 원주 원씨(原州 元氏), 추계 추씨(秋溪 秋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 남양 홍씨(南陽 洪氏), 해주 최씨(海州 崔氏) 등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고 있다.
2) 영흥리
영흥리는 상추자도 남동쪽에 위치한 어촌 마을이다. 마을 뒤편에 큰산, 뒷산, 등대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앞바다에는 염섬, 이섬, 추포도 등의 섬들이 보인다.
영흥리는 대서리와 바로 인접한 마을로 멀리서 바라보면 한 마을처럼 보인다.
영흥리 마을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마을 형성과 관련하여 언제부터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았고, 마을의 규모가 확대되었는지를 현재 살고 있는 성씨들을 통해 유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영흥리의 마을 형성과 관련해서는 약 300여 년 전 밀양 박씨(密陽 朴氏)와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영흥리에는 밀양 박씨, 초계 최씨(草溪 崔氏), 인동 장씨(仁同 張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 등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3) 묵리
상·하추자도를 연결하는 추자교를 지나면 양갈래의 갈림길이 나온다. 묵리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나오는 첫 번째 마을로 돈대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바닷가를 끼고 있는 어촌마을이다. 마을 앞 바닷가에 섬생이와 수영여가 바라다 보인다. 묵리는 ‘묵이’, ‘무기’라고도 부른다. 이는 조선추기에 작성된 1789년 『호구총수』와 1872년 「영암추자도지도(靈巖楸子島地圖)」에 ‘묵지(墨只)’로 표기되어 있는데, 묵지는 무기의 한자차용표기이다. 민간에서는 산으로 둘러싸여 해가 늦게 뜨기 때문에 ‘묵이’라 했다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묵리의 마을 형성과 관련해서 언제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고 마을의 규모가 확대되어 갔는가를 현재 살고 있는 성씨들을 통해 유추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묵리는 약 100여 년 전 정씨와 조씨 등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1870년에 정만식(鄭晩植)이 이필제(李弼濟)의 역모사건에 연류되어 이 마을로 종신유배형을 받고 와서 살았으며, 1876년 조병창(趙秉昌)도 이 마을로 유배 와서 살았으므로 이들이 설촌(設村)하였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묵리는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유배인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는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묵리 사람들의 입도 시기는 대부분 18~19세기로, 주로 해남 등지에서 입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연유로 섬으로 들어온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이미 18세기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후 여러 성씨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정착하면서 점차 마을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신양1리
신양1리는 면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추자도의 신양항을 끼고 있는 마을로 도로변에 길게 자리한 어촌 마을이다. 신양리는 신상리(新上里), 신하리(新下里)의 자연촌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마을 뒤에는 돈대산이 감싸고 있고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진 곳이다.
신양1리의 마을 형성과 관련해서 언제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고 마을의 규모가 확대되어 갔는가를 현재 살고 있는 성씨들을 통해 유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양1리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진주 강씨(晋州 姜氏) 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신양1리 사람들의 입도 시기는 18세기로, 어떤 연유로 섬으로 들어온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이미 18세기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볼 수 있고, 이후 제주고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등 여러 성씨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정착하면서 점차 마을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신양2리
신양2리는 추자교를 지나면 묵리와 바로 인접한 마을로 앞뒤에는 낮은 산이 있고 농토가 펼쳐져 있다. 예부터 주민들은 진작지, 장작지라 불렀다. ‘진’은 길다(長)는 뜻이고, ‘작지’는 자갈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곳은 추자 10경 중의 하나인 장작평사(長作平沙)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동쪽 해변에 길게 발달한 자갈 해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해변가에 자갈이 펼쳐져 있다.
신양2리의 마을 형성과 관련해서 언제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고 마을의 규모가 확대되어 갔는가를 현재 살고 있는 성씨들을 통해 유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양2리는 황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후 하씨가 들어와 마을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황씨와 하씨 집성촌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많이 살고 있다. 신양2리 사람들의입도 시기는 17~19세기로, 영암·해남 등지에서 입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후 여러 성씨 등이 하나 둘씩 들어와 정착하였지만 황씨와 하씨가 대를 이어 살면서 마을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예초리
예초리는 하추자의 동북단에 위치한 어촌 마을이다. 앞에는 상추자도의 대서리가 멀리 내다보이고 마을 뒤에는 산이 있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예초리의 마을 형성과 관련해서 남아 있는 문헌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1998년에 북제주군과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유물 산포지가 남아 있다. 유물산포지는 예초리 해안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으며, 탐라시대의 무문토기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탐라시대 이전부터 예초리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예초리의 마을 형성과 관련해서는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언제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고 마을의 규모가 확대되어 갔는가를 현재 살고 있는 성씨들을 통해 유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초리는 약 300여 년 전에 함안 조씨(咸安 趙氏)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이후 동복 오씨(同福 吳氏)가 들어왔다고 한다. 예초리 사람들의 입도 시기는 17~18세기로, 경남 함안, 해남 등지에서 입도하였다. 어떤 연유로 섬으로 들어온 것이지 명혹하지 않지만, 이미 17세기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후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이 하나 둘씩 들어와 정착하면서 점차 마을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자연경관
1) 봉골레산
상추자 대서리 최북단에 위치한 봉골레산은 해발 85.5m의 낮은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추자군도를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남해안의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섬들을 볼 수도 있다.
2) 신대산
날씨가 좋은 날 하추자도의 남쪽 신대산에서는 한라산을 볼 수 있다. 앞쪽 바다에는 사자머리 모양으로 생긴 수덕도가 있다.
3) 돈대산
해발 164m인 돈대산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은 추자면을 해양관광의 최적지로 만든다. 돈대산 능선길은 약간의 경사도가 있으며 정상에서는 묵리, 신양리, 예초리 등 하추자의 마을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볼 수 있다. 돈대산 정상에서는 해마다 새해 해맞이 행사를 한다.
4) 다무래미(따무래미)
상추자 끝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봉골레산에서 내려오면 썰물 때는 건널 수 있는 추자면의 ‘모세 기적의 섬’이다. 섬은 연결되어 있지만 밀물이 들면 부분적으로 바다에 잠기기도 한다. 소나무, 갯바위가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며, 멸치 떼를 쫓는 숭어가 쉴 새 없이 뛰어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5) 횡간도
횡간도에는 10여 가구의 해녀 가족이 전복, 소라 등을 잡으며 생활하고 있다. 주민은 18명 정도인데 해녀들은 물질을 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해초, 미역, 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며 살아가고 있다. 민박집도 3가구 있다.
6) 사수도
사수도는 상록활엽수림이 울창하여 하늘을 가릴 정도이다. 숲에는 흑비둘기가 둥지를 틀며 땅 속에는 슴새가 구멍을 파서 둥우리를 만든다. 섬개개비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1982년 천연기념물 333호 사수도 해조류(흑비둘기, 슴새) 번식지로 지정되어 있다.
7) 후포
후포는 물놀이를 하기 좋은 곳으로 지금은 배가 들어오지 않지만 예전에는 어선이 들고 나가기도 했다. 상추자 어린이들이 이곳에서 수영을 배우며 놀기에 좋은 곳이다.
8) 나바론 절벽
영흥리 처사각 뒤편으로 심한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나바론 절벽이 나온다. 배를 타고 나가야 멋진 비경을 제대로 볼 수 있지만 용등봉에서 보는 경치도 일품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바론 요새처럼 난공불락으로 보인다고 해서 나바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나바론 절벽 부근은 비교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여러 종류의 식생들이 어우러져 있다.
9) 묵리 고갯길
묵리는 마을의 앞뒤가 산에 둘러싸여 있어 해가 늦게 뜨는 고요한 마을이다. 묵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섬이 아니라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주는 아늑하고 아름다운 숲길이다.
10) 모진이 몽돌해안
추자도에는 해안 곳곳에 몽돌밭이 있는데 특히 모진이에는 몽돌로 이루어진 해안이 100여 m나 이어져 있어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시원한 샘물이 바다에서 솟아나와 몸을 씻기에도 충분하며, 샤워탈의장 등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다.
○ 추자10경
우두일출(牛頭日出): 소머리 모양의 섬 우두도의 해돋이 광경
직구낙조(直龜落照): 추자 서북방 직구도의 아름다운 저녁노을
신대어유(神臺漁遊): 황금어장 신대에서 고깃떼가 노는 모습
수덕낙안(水德落雁): 사자섬 절벽에서 새들이 수직으로 나는 광경
석두청산(石頭靑山): 석지머리의 청도라는 섬의 푸른 소나무
장작평사(長作平沙): 신양포구 장작지의 자갈 해수욕장
추포어화(秋浦漁火): 추포도 멸치잡이 배의 불빛
횡간추범(橫干追帆): 흰 돛을 편 배들이 시원하게 바다를 가르는 장면
곽개창파(곽개蒼波): 바다 한 가운데 외로이 떠있는 관탈섬(곽개)의 파도
망도수향(望島守鄕):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인 보름섬의 고향 그리움
▢ 추자의 볼 거리
◌ 최영장군 사당
최영장군 사당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에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도로 가던 최영장군이 풍랑으로 추자도에 머물 당시 백성들에게 어망을 만들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 은혜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제주도기념물 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당 입구 남동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바로 옆에는 ‘최영사당금표’가 있으며, 최영장군 사당 뒤로 올라가면 귓개산 정상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추자군도의 풍경 또한 빼어나다.
1964년 사당 단청 및 담장을 보수하였고, 1970년 국고보조에 의하여 건물이 복원되었으며, 1971년 8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8년 외문을 새로 지었다. 건평이 약 5평이고 평면 3칸이며 기와로 덮인 사당 안에는 1m 높이의 비로 만들어진 위패가 서 있다. 위패에는 「朝國都統大將崔瑩將軍神位」라고 새겨져 있다.
사당 건물에 걸려 있는 『崔瑩大將神祠』라는 편액은 추자도 출신 海洲 元容植(1907~1957)의 작품이다. 이 현판은 1925년 처음 귀향하여 사당에 참배하러 갔다가 남긴 휘호(揮毫)와 내부 벽화이다. 이는 초기 작품이어서 비록 수작은 아니지만 그의 예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사당은 2012년 다시 보수하였다.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평면과 전면칸은 퇴칸처럼 좁게 나눈 것이다. 원뿔형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렸으나 중도리, 종도리는 굴도리이다.
보아지는 곡면으로 장식되고 겹처마에 합각지붕이다. 심벽에다 외부로 돌로 쌓은 벽은 노출된 전면 외진주 밖까지 돌출시켜 기둥을 보호하게 했다. 전면에는 세살문을 달아 개방시켰고 내부 주칸에는 신위가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모로단청이 되어 있다. 사당 밖으로는 자연석으로 높은 담장을 둘렀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大祭’ 혹은 ‘祠堂祭’라 한다. 대제는 본래 여름철에 모셨다. 여름철에 멸치 어장이 형성되고, 최영장군을 모시는 것이 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수협에서 대데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맡고 있다. 수협에서 대제를 맡으면서부터 祭日을 봄철로 옮겨 吉日을 받아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이는 주요 어업자원이 조기로 바뀌었고 그 성어기가 봄철이기 때문이다.(1999년에는 양력 4월 1일에 제를 올렸음) ‘큰새미’라고 하는 샘에 3∼4일 동안 금줄을 쳐 두었다가 그곳의 물을 떠다 제사에 썼다. 개인이 정성을 들일 때에는 「젯새미」라는 샘물을 이용한다. 祭場에도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과거에는 祭主 한 사람을 정하여 祭主 집에서 沐浴齋戒하고 제반 음식을 마련하였다. 제물로는 삼치·시루떡·시금치·산나물·듬부기·녹두나물 등을 준비한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Ⅱ 64쪽) 돼지고기를 쓰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으며, 최영장군에 대한 제사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은 어업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를 지낸다.(한라일보 2004년 3월 11일)
옛날에는 제를 지낼 때 축을 고하지 않고 했지만 조선말 제주도로 유배온 선비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축문을 지어 주어서 제례시에 고하고 있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干支云云 獻宮幼學某 敢昭告于 朝國都統大將崔瑩將軍之靈 天覆地載 神明照鑑 靈 驗昭昭 致誠報應 己多陰德 居民賴生 伏惟尊靈 舟缺欺土 祝願 漁農豊饒人物咸寧 謹以淸酌 次冠庶羞 欽薦于神 尙饗」
사당 왼쪽 문 앞 위에는 <崔塋將軍神祠新築記>가 걸려 있는데 종서로 되어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漂漂氣像은 與闕張으로 張(戶+月)하고 堂堂忠義은 使夷齊로 齊立이라. 以麗朝臣都統으로 節鉞摩南에 伏耽羅할새 候風斯島故로 島民이 去後益詠而立祠하고 生牛尊誠에 致祥消魔之己自數百年靈 驗이은(있은?) 바 自甲午以後茅宇甲戌以來하야 風霖可年層에 棟礎山律 地하고 人往獸踏에 祠土가 不潔하고 驚惶洞詣이다가 卜地新創은 大西里區長 李起雄 및 有志人의 夙興夜深之誠而此地建營之애 庶民이 自來하야 敖不活躍薦廟有歡樂樂以謂其 曰神境淨하고 永世不忘之功을 註以記也 一九三五年 乙亥 二月 二十五日 築化主 李起雄 事 監 李奉淑 朴達只 朴炳南 金京玉 金學良 朴京云 朴在吉 朴化善 金泳澤 元泰益 築 秋大燁 都木手 李仁兼 助木手 吳在連 記述人 金汝天 庚戌年 改築 文化財 戊午年 彫刻 秋大燁 顧問 面長 朴昇奎 理事 高亨來 化奄神 遺芳百世(고영철의 역사교실)
◌ 처사각
처사 박인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 박인택은 조선 중기 사람이다. 추자도로 유배와 많은 백성들을 치료해 주고 불교 교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3) 순효각
상추자 영흥리 마을 안에 있는 것으로 지극한 효성을 실천한 박명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아버지의 병에는 꿩을 구해 드리고 어머니에게는 손가락을 잘라 수혈했다고 한다. 순효각 앞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자는 응칠 밀양인이요, 경력공 효원의 13세손이다. 일찌기 아버지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다 하므로 슬피 울어 하늘에 빌자 다음날 꿩을 얻어 드리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도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여 그 목숨을 연장하니, 목사가 순시하여 포상하고 그 행실을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에 기록했다.」
비석에는 앞면 가운데에 「學生朴明來純孝之碑」라고 큰 글씨로 쓰여 있고, 좌우에 ‘父病得雉 孝當人行 母殞斷指 以延天壽 士林薦文 千秋近跡 道伯褒賞 銘石不朽’라고 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안내판에 있는 내용이 한문〈字應七密陽朴氏經歷公派孝元之十三世孫 常父病禱天致曲時欲食雉肉 哀泣而求之翌日得焉 母將殞指血灌口一以延其壽 順使褒賞 行狀昭載續修三綱錄 而〉(추자도명 129쪽)으로 새겨져 있다.
옆면에는 昭和 五年 庚午 立碣 라고 쓰여 있다. 소화 5년이면 서기1930년이다. 1998년 12월에 건물을 개축했는데 상량문은 당시 추자초등학교 교사 현인부(1998∼1999년 추자교 근무)의 글씨이다.(고영철의 역사교실)
○ 추자올레길
추자올레는 추자면의 많은 부속 섬들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바람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이다. 상추자의 대서리에서 출발하여 총 17.7㎞에 달하는 코스로 아래와 같다.
추자항→최영장군 사당→봉골레산 정상→천주교 추자공소→순효각 입구→처사각→나바론 절벽→추자등대→추자교→묵리 고갯마루→묵리마을→신양2리→신양항→모진이 몽돌해안→황경한의 묘→신대산 전망대→예초리 기정길→엄바위 장승→돈대산 정상→추자교→영흥 쉼터→추자항
선명 운항구간 요금 이용안내 핑크돌핀호 제주-> 추자 -> 진도 ->목포 제주-> 추자 제주(064)-758-4233 목포->진도 -> 추자->제주 추자 -> 목포 한일카훼리3호 완도 -> 추자 -> 제주 제주 -> 추자 제주 (064)751-5050 제주 -> 추자 -> 완도 추자-> 완도 추자호 대서 ->추포-> 횡간 13:30 13:45 14:00 추포도 횡간도 064-728-4291
(쾌속선)
[상추자도]
09:30 10:40 11:55 12:40
11,500원
상추자(064)-742-3513
목포 (061)-243-1927
14:00 14:45 16:10 17:20
44,550원
[하추자도]
07:30 10:30 12:30
8,600원
하추자 (064)742-8364
완도 (061)554-8000,
061-554-0045
13:40 15:40 18:40
19,600원
(행정선)
주민이용 행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