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들어와
38도선을 경계로 주둔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분단 상황이 이루어졌다.
광복 이후 새로운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었으나
정치 지도자들은 좌우로 이념이 갈라져 대립하였고
미국과 소련은 냉전의 대립으로 치달아갔다.
광복 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제주도 건준이 결성되고 나중에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9월 23일 제주농업학교에서
각 읍・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을 계기로 1945년 말에 이르기까지
청년동맹・부녀동맹・농민위원회・소비조합 등
각종 사회단체가 속속 조직되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치안 활동에 가장 주력하여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일과
토지・산업체 등 적산(敵産)이나
군수물자를 멋대로 처리하는 것을 감시하였다.
인민위원회의 자율적인 움직임과 함께
제주도에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로서
제주도 좌익진영은
이 날 기념식을 전도민적 행사로 치르기로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3・1투쟁기념행사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고
3・1절 기념행사 준비는 민전이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과 집회 사전 허가 원칙을 정하였다.
민전 의장단과 미군정 당국 사이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3・1절 행사는 당초 계획대로 강행되었다.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 별로 치러졌고
제주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제주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서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어린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하여 총격을 가해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 총격 사건 이후 제주도내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좌익진영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폭로하며 희생자 구호금 모금에 나섰다.
이어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은 물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미군정청은 3월 8일 합동조사반을 제주에 파견하고
전남・북과 경기도 응원경찰을 증파해 총파업에 강경 대응하였다.
한편 조병옥 경무부장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이 사건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하여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조작하였다.
또한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 혐의로
민전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여 4월 10일까지 500명을 검속했다.
검속된 자들 가운데 5월말까지 328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52명이 실형을 언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됐다.
평화적인 3・1절 기념식 참여와 3・10총파업 동참을
미군정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오인하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남로당은 전국적으로‘3·22 총파업’을 전개하는 가운데
제주도내 교원 공무원 등을 포함한
파업 검속자는 500명에 이르고
경찰감찰청으로부터 송치된 3·1사건 피고는 300명이 넘었다.
미군정은 관공서와 교육계에 대한 숙청 작업에 착수하여
총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을 파직시켰다.
서북청년 회원이 대거 제주도에 들어오고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이때 많은 청년들이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일부는 한라산의 동굴 등에 피신했다.
1948년 1월 남한 단독 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될 것을 걱정하여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남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단독정부 반대・남북협상의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과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으로 갈라졌다.
이런 정치 상황에서 남조선노동당(약칭 :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우고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갔다.
결국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취조가 이루어졌다.
혹독한 고문과 구타 그리고 총살까지
잔인한 탄압이 감행되자
궁지에 몰린 제주도내 좌익진영은
결국 결사 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다가오는 5・10 단독선거 반대를 명분으로 내걸고
비밀회의를 거쳐
4월 3일 350여 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새벽 2시를 기해 제주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미군정은 약 100명의 전남경찰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설치하고
제주 해상교통 차단하고 미군 함정 동원해 해안을 봉쇄하였다.
또한 미군정은 무장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경찰전문학교 간부후보생과 특별부대 파견함은 물론
제9연대에게 경찰과 협조하여 진압작전에 참가하였다.
무장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여
투표소를 습격하여 방화하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는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하였다.
미군정은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72시간내 전투중지와 무장 해제 등에 합의하는가 싶더니
5월에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을 파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방화는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하였다.
5월 5일 제주에서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선무귀순공작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익렬 연대장은 문책을 받아 해임되고
다음날 9연대장은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면서
강경 진압의 길로 선회되었다.
무장대는 5・10단선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하여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살해하는 한편, 선거인명부를 탈취했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 무장대는
중문・표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했고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하여 입산하여 선거를 거부하였다.
이에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표수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자
미군정은 북제주군 2개 지역의 선거 무효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지만
선거를 치를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재선거는 무기 연기되었다.
5・10선거의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제주도민들에 대한 대탄압으로 변질되었다.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경찰 특수부대를 파견하는 한편 서청 단원을 계속 증파했다.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경비대가 주도하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5월27일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무려 6,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무리한 토벌이 이루어지자
서서히 경비대의 강경 방침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겠다는 포고가 있고
제헌국회가 개원되어 이승만이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무렵
1948년 7월 중순경부터
북한의 정권 수립에 따른 남한 전역에서 지하선거가 실시되는데
주로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무장대의 강요에 마지못해
가명으로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누른 것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1948년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남한의 지하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모여
남조선인 민대표자회의가 열렸는데
길달삼은 4・3봉기의 정당성과 성과를 정리한 연설을 하였다.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대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제주도는 더욱 정부의 강경 진압 대상이 되었다.
무장대 총책이던 김달삼 다음 이덕구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10월에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고
제주 해안에서 5㎞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하고
위반시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무장대가 이덕구 명의로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자
제주도내 곳곳에서 토벌대와의 충돌로
공포의 방화와 총살이 이루어졌다.
아무 죄도 없는 노인 그리고 어린이까지
집단총살이 이루저지고
약 4개월간 중산간마을은 초토화되었다.
이 초토화작전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주로 중산간 마을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지만
4・3사건 전 기간의 희생자 수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 태웠다.
소개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자행되었다.
일부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소개해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대살했다.
이러한 소개 작전은 주민들을 오히려 입산하게 만들었고
수많은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아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토벌대 편으로 기운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무장대 세력이 궤멸 상태에 놓인 이후에는
굶주림에 처한 잔여 무장대들이 식량을 약탈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그러던 가운데 비극의 6·25전쟁 발발되자
전국 요시찰인을 예비검속자로 구치소에 수감하였다.
정부의 비상계엄이 남한 전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토벌대는 예비검속으로 수감했던 사람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된 후 암매장되거나
섯알오름 등 곳곳에서 집단 총살되었다.
1952년 제주도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하고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다.
무장대가 거의 괘멸 상태에 이르자
9월에 한라산 금족구역이 해제되었고
소개되었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이주・정착사업이 전개되었다.
그후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지역에서 생포되면서 4・3은 종식되었다.
결국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우리나라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다.
4・3이 종료된지 70년이 넘지만
4・3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
4・3으로 인해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여 일본에서 생을 마쳤다.
또한 제주도의 중산간에는
예전에 이곳이 집터였음을 알리는 대나무만 무성할 뿐
그날의 통한을 알아줄 사람이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다.
아직도 논란이 많은 4.3에 대하여
정부는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도 미미한 가운데
잃어버린 마을과 잃어버린 가족의 그날의 상처는
파란 허공에 가느다란 외침으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기억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화해와 상생을 외치는 제주에는
오늘따라 바람도 숨죽인 가운데
또다시 고요한 4.3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