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거룩한 성인 테레사 수녀!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며 자신의 몸을 가장 낮은 데로 낮추어 인류애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사람!
보통 사람, 그리고 종교에 헌신하며 인류에게 사랑을 외치는 신도들조차도 몸소 실천하지 못하는 일을 오로지 자기희생으로 각박한 현대 인류사에 빛나는 정신을 보여주었던 사람!
인도 캘커타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반 세기 가까이 보듬어 '빈자의 성녀'로 추앙받은 테레사 수녀가 드디어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을 보기 위하여 수많은 인파가 축제의 현장인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마더 테레사를 '산타(성인) 테레사'로 선포합니다."
9월 4일 오전(현지시간) 약 12만 명의 인파가 빼곡히 들어선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테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선포한다는 말에 모인 군중들은 환희와 감격이 넘쳤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로 중부유럽과 아테네를 잇는 주요거점 도시인 유고슬라비아 스코페에서 태어났습니다. 스코페는 현재는 마케도니아공화국의 수도이지만 테레사 수녀가 태어날 당시에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500년간이나 받아온 도시로 스코페 지역에는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고 있었고 테레사 수녀의 부모의 경우도 아버지는 아르메니아계이고 어머니는 알바니아계였다고 합니다.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던 만큼 종교도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등이 혼재해있던 이 지역은 19세기말부터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어 20세기 초반 많은 정치적 변화를 겪었고 그 와중에 부유한 사업가이던 테레사 수녀의 아버지 니콜도 정치운동에 휘말려 그녀가 태어난 그 해에 사망하고 맙니다.
당시 이 지역의 종교는 그리스 정교나 이슬람교가 대부분이었고 가톨릭을 믿은 집안은 별로 없었는데 테레사 수녀의 집안이 가톨릭을 믿은 것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어린시절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영민했으며 신앙심이 매우 돈독했고 12살 때부터 인도로 가서 수녀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18세에 어머니로부터 수녀가 될 것을 허락받은 테레사 수녀는 고향을 떠나 아일랜드에 있는 로레타 수녀회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 있던 로레타 수녀회에서는 많은 수녀들을 교육해 이들을 역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로 파견했는데 수녀들의 주요 임무는 식민지에 나가있는 영국계 백인의 딸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28년부터 3년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기초교육과 영어를 배우고 1931년 인도의 다질링으로 갔습니다. 이때부터 테레사 수녀는 본명 아그네스 외에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선택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의 콜카타에 있는 성 마리아 수녀원의 부속 학교에서 소녀들에게 지리학을 성실히 학생을 가르쳤고 16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면서 교장으로까지 승진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수녀는 1946년 갑자기 바뀌게 됩니다.
1946년 콜카타에서 다즐링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안온한 로레타 수녀회에서 나가 거리에서 고통 받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단에서는 이미 로레타 수녀회 속에서 평생을 다하기로 한 테레사 수녀가 거리로 나가면 신변보호문제, 종교적 문제 등등으로 인해 수녀회를 벗어나 거리로 나가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2년 동안 청원한 결과 마침내 당시 교황이던 비오 12세로부터 수도원 외부거주를 허가받고 1948년 인도의 거리로 홀로 나섰습니다.
당시 인도는 2차 대전 이후 마침내 200여년 간의 영국 지배를 벗어난 인도는 독립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종교적, 정치적인 상황이 맞물려 여러 곳에서 전쟁과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회는 불안정했고 인도 거리 어디를 가나 난민들이 넘쳐 흘렀으며 그들은 대부분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굶주림과 병마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거리로 나오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테레사 수녀의 봉사의 손길을 선교의 뜻으로 오해하고 적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로지 신의 부르심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인도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검은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었습니다. 흰색 사리는 인도의 여인 중 가장 가난하고 미천한 여인들이 입는 옷이었는데, 이 옷은 훗날 테레사 수녀를 상징하는 옷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는 종교를 전도하기 위해 나온 사람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인도의 국적으로 바꾸었습니다.
맨 처음 5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작했던 테레사 수녀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수녀회 부속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그녀를 도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 병든 사람들을 간호하고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으며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집이 만들어지고 나병환자들이 모여 재활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마을이 생겼습니다.
가톨릭 교단도, 인도 정부도 그녀의 헌신적인 봉사와 박애를 인정하고 도처에서 그녀를 돕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테레사 수녀를 중심으로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결성되고 후원 단체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되자 가톨릭 교단과 교황도 그녀의 활동을 지지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기부금이 모아지고 많은 유명인사들이 테레사 수녀를 만나기 위해 인도를 방문했고 그때마다 거액의 기부금을 내놓았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기부금은 통째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고 본인은 다 낡아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역력한 흰색 사리 하나만을 걸친 채 나병 환자를 씻기고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본 세계인들은 테레사 수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아 상금을 콜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두 썼고 시상식 만찬을 거부하고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세계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란 기자의 질문에는 "집에 돌아가 가족을 사랑해주세요."라고 말은 너무나 실천하기 쉽지만 어려운 대답이었습니다.
생자필멸의 진리 앞에서 일생을 오로지 가난한 자, 병든 자 구호에 헌신한 테레사 수녀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1997년 테레사 수녀의 임종은 그녀의 보살핌을 받던 인도 콜카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녀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면 그리고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욕심을 내려놓고 남을 위해 할 일이 엄청 많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5장 12절)
마더 테레사의 무덤 앞에 새겨진 묘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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