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목장은 신천리 동쪽 해안선에서 약 10만 평 규모로 형성된 잔디밭으로 과거 신천마을의 하목장이었던 곳이다. 이 근처에 있는 마장굴은 용암동굴로서 동굴유적이다. 여기에서는 신석기 시대, 탐라시대 유물이 동굴 입구와 내부에 패총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신천리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볼 수 있으나 실직적인 설촌은 1552년(명종 7년) 왜구의 침입으로 발생한 천미포란과 인연이 깊다. 천미포란 때에만 하더라도 신천리 지역에 거주하는 가호는 5~6호에 지나지 않았다. 천미포란을 겪고 나자 천미연대가 외적 방어상 더욱 중요시 되어 많은 군사를 주둔시킴으로써 인가가 증가된 것이다. 즉 천미연대가 신천리 설촌의 효시라는 것이다. 이곳이 남쪽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아야 하는 요충지였으므로 연대를 쌓아야 했고, 연대에서 왜구의 침입을 살피려 하니 사람이 가까이 살아야 했다.
처음에는 연대를 지키는 병사들이 가고 오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연대 주위를 찾아 모여들었다. 400년 전 천미연대에 근무하는 병사들과 신풍리와 하천리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생활이 어렵거나 개척정신이 강한 몇몇 사람이 해산물이 풍부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설촌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1609년(광해 원년)이다.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신천리 본향당(고첫당)이 바닷가에 있음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설촌 씨족들은 현씨, 고씨, 최씨로 전해지고 있다.
신천리의 옛이름은 내끼이다. 『중종실록』에 ‘川尾浦/내깍개’, 『탐라순력도』에는 ‘川尾浦/내깍개’, 『탐라지도』와 『제주삼읍도총지도』등에 ‘川尾浦/내깍개, 川尾場/내깍장, 川尾村/내깍을’,『제주삼읍전도』와 『정의군지도』, 『정의읍지』등에 ‘新川里/새내깍을’로 표기하였다. 『제주읍지』에는 ‘새내깍을은 정의현 관문에서 남쪽으로 15리의 거리에 있다. 민호는 19호, 남자는 48명, 여자는 66명이다’고 하였고 『삼군호구가간총책』에는 ‘신천의 연가는 36호이다. 남자 135명과 여자 194명을 합하여 330명이고 초가는 87칸이다’고 했다. 처음 내깍(천미천)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川尾村/내깍을’이라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내깍을’ 중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알내깍/下川尾’이라 하고,‘알내깍을’ 중 동쪽에 생긴 마을을 ‘새내깍을/新川尾里’라 하였다. 그후 新川尾里에서 尾가 생략되어 新川里가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에 新川里와 下川里 일부를 통합하여 제주군 성산면 신천리가 되었다.
* 자료 출처: 풍천초등학교 향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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