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리의 설촌 연대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돌칼, 돌도끼와 해안에 있는 고인돌 등 선사시대의 유물로 미루어 보면 선사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촌락 형태가 이루어진 것은 1423년(세종 5년) 정의현이 고성리에서 현 표선면 성읍리로 이전되면서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에 현씨 이방이 살던 집터라 지칭된 속칭 ‘선이방터’와 현비장의 무덤이 있어 연유한 ‘현비장골’이란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처음 살기 시작한 사람은 현한형이라 알려지고 있는데 출생 연대는 알 수 없고 그의 현손 현치운의 만력무인생이라 묘비에 각인 된 것으로 보아 정의현이 성읍리로 옮겨진 뒤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술한 지명에는 선이방, 선비장 등 지명에 관직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씨 성을 가진 관리들이 퇴임하고 읍성이 가깝고 천미천에 식수가 풍부하여 모여 살게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또한 부씨, 변씨, 고씨도 살았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684년(숙종 10년)경에 오치원, 오계원 형제가 입주하였고, 1726년(영조 2년)에는 신천 강씨인 강영흥이 같은 해 뒤를 이어 경주 김씨 김광수가 입촌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공산 김씨인 김한욱이 입주한 뒤 임씨, 홍씨, 김해김씨, 청주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천미천의 동서쪽에 몇 호씩 흩어져 살아 지금과 같은 촌락은 형성되지 않았으나 중엽으로 내려오면서 자연적으로 마을이 커지며 인구가 증가하였다. 더욱이 반상의 구별이 심해지면서 향족과 토족이 구별되었고 향족은 천미천 상류, 토족은 하류에 마을을 형성하게 되자 윗마을은 웃냇끼, 아랫마을을 알내끼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천미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 신풍, 신천, 표선면 하천리를 통틀어 냇끼라 부르고 신풍리를 상천미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천리와 신천리는 마을 이름을 바꾼 일이 없지만 상천리는 순조 철종 년간(1800~1863)에 당시 대학자인 오진조가 오장헌의 패공고사를 따라 신풍리라 고쳤고 고종 말년에 마을을 둘로 나누어 신풍리, 신평리라 부르다가 다시 합쳐서 신풍리라 불렀다.